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엔촐레른 가문 (문단 편집) == 현황 == 호엔촐레른 가문이 나치 독일에게 협력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5월, 네덜란드 정부는 빌헬름 2세의 도른 하우스를 몰수했으며 호엔촐레른 가문은 도른 하우스에서 쫒겨났다. 1956년 도른 하우스는 박물관으로 재개장해서 오늘날에 이른다. 빌헬름 2세의 묘소도 여전히 도른 하우스에 있으며, 2014년에는 빌헬름 2세의 현손자이자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이 네덜란드 정부에게 도른 하우스의 소유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2019년에는 체칠리엔호프 궁전을 비롯한 호엔촐레른 가문의 유산들을 돌려달라고 독일 정부 산하 프로이센문화유산재단에 소송을 걸었지만 기각되었다. 도른 하우스에서 쫒겨난 이후 [[브레멘]]으로 이주했다. 오늘날의 호엔촐레른 가문은 많은 왕자들이 [[귀천상혼]]을 해버려서 1918년 당시보다 규모가 줄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의 국가들 상당수가 군주정이 폐지되면서 왕족이나 귀족들이 없어졌으니 당연히 대부분은 귀천상혼을 할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결혼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귀족 직함만 가지고 있는 여성과 결혼하기만 해도 동등결혼으로 인정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랬다.[* 그나마 호엔촐레른 가문이 [[아들]]들이 매우 많아서 지금까지 버틴 것이다. 직계인 빌헬름 2세는 6남 1녀, 빌헬름 황태자는 4남 2녀, 루이 페르디난트는 4남 3녀, 루이 페르디난트의 손자이자 현 가문의 수장인 게오르크는 3남 1녀를 두었다.] 그래서 빌헬름 황태자의 뒤를 이어 가문의 수장이 된 루이 페르디난트는 차남이었다. 그리고 루이 페르디난트의 네 아들 중 장남과 차남은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포기했고, 같은 이름을 가진 3남은 군복무 중 사고로 사망했는데, 3남의 1남 1녀 중 장남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게오르크 프리드리히]](1976년생)[* 게오르크의 어머니인 카스텔뤼덴하우젠의 도나타(1950~2015)는 남편이 사망하고 세월이 흘러 [[올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1936 ~ 2017)와 재혼했는데, 이 사람은 도나타의 시누이 마리체칠레의 전 남편이었다. 한국이었다면 이런 관계는 근친혼으로 간주되므로 결혼이 불가능하다.]가 현 수장이다. 여담이지만 게오르크는 고조할아버지인 [[빌헬름 2세]]와 상당부분, 코와 눈매를 비롯한 얼굴의 외모가 닮았다. 루이 페르디난트의 장남과 차남은 귀천상혼을 해서 수장 자리에 대한 계승자격이 없었는데, 결혼 당시에는 자신들의 계승자격이 박탈되는 걸 인정했다가 조카가 수장 자리에 오르고 난 뒤에 귀천상혼이 인간평등에 어긋나는 위헌이라며 독일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 대법원까지 간 끝에 대법원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프로이센 왕가의 적법한 수장이라는 것을 인정하였으나, 재산은 그의 삼촌들에게도 분배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이젠부르크의 조피 요한나(Sophie Johanna von Isenburg)와 결혼하여, 현재 후계자 카를 프리드리히를 비롯한 3남 1녀를 두고 있다. 한편 [[로마노프 왕조|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현 가문의 수장(논란 있음)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마리야 여대공]]의 외아들 게오르기[* [[빌헬름 2세]]의 막내아들 요아힘의 증손이다.]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와 8촌간으로,[* 정확히는 8촌이자 6촌이다. [[빌헬름 2세]] 기준으로 부계혈통만 따지면 8촌이지만,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할머니인 키라 여대공이 마리아 여대공의 고모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때문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알렉산드르 2세]]의 여계후손이기도 하다.] 그가 수장이 되면 가문 이름이 호엔촐레른로마노프 가문으로 바뀔 예정이라고 한다. 참고로 호엔촐레른 가문 대표들과 독일의 문화 재단 등은 황실 유산 문제에 관해 2014년부터 비밀리에 과거 빼앗긴 자신들의 보물과 재산을 되돌려줄 것을 독일 정부와 프로이센문화유산재단 등에 요구했지만 2023년 봄에 반환 요구와 소송을 철회했다. 종가 측에서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다.([[https://www.preussen.de/]]) 참고로 사이트 주소가 참 직관적이다. 독일어가 되는 사람이라면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파일:호엔촐레른가와 합스부르크가.jpg|height=500]] [[독일/역사|독일 역사]]에서 라이벌인 이미지와 다르게 [[합스부르크 가문]]과는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의 즉위를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가 도운 것도 그렇고, 싸운 기간보다는 오히려 협력한 기간이 더 길다.[* 더 정확히는 호엔촐레른 가문이 북독일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충견(...)을 자처했다.] 다만 합스부르크 가문과는 거의 통혼하지 않았다. 모계쪽 조상으로 일부 섞인 정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종교적 이유로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 [[보르본 왕가]] 및 그 분가, [[사보이아 왕가]] 등 가톨릭 국가의 왕가와 주로 통혼하였고, 개신교 국가와의 통혼은 거의 없었다. 다만, 호엔촐레른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혼은 [[종교개혁]] 이전에도 없었다. 두 집안 간의 혼담이 논의된 사례가 있긴 한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손녀인 프로이센의 마리아 안나 공주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결혼이 추진되었다가, 마리아 안나가 이미 약혼한 상태라 혼담이 무산된 일이 있었다.] 2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1553~1618)의 부인 클레베의 마리 엘레오노르(1573~1608)의 어머니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딸인게 그나마 가까웠으며,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3세가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5세의 딸 베아트릭스와 결혼하여 알브레히트 4세를 얻었다. 다만 알브레히트 3세의 가계는 증손자인 오스트리아 공작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 독일왕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로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도 겸했다.]가 어린 나이에 죽으면서 대가 일찍 끊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